길은 있습니다

 

젊었던 한때의 일입니다. 강릉 쪽에 친구가 살고 있어서
서너 명이 무작정 여행을 떠났지요.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
거나 하던 때여서 모두들 살아가는 방법에 미숙하기 그지
없었던 터라 며칠을 비비지도 못하고 금방 주머니가 텅텅
비더니 급기야 땡전 한 푼 없는 거지가 되었습니다. 거리
를 배회하다 오갈 데 없어 다방으로 들어갔습니다. 그래도
오기는 있어서 큰소리치며 이것저것 시켜 먹기는 했지만
이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. 꾀죄죄한 몰골에 소위 맡기기
라도 할 만한 변변한 금붙이 하나 없었던 촌놈들이니 말입
니다.
해는 지고 불은 켜지고 슬슬 마담의 시선이 따가워지기
시작하는데 방법이 없었습니다. 그러다가 머리 좋은 녀석
의 제안으로 일단 튀기로 하였습니다. 이런저런 핑계로 한
두 명이 먼저 나가고 최종 마무리를 날렵한 제가 하기로
했지만 눈치가 구단인 마담이 그걸 모를 리 없었습니다.
화장실을 가도 아가씨가 졸졸 따라다녔고 엉덩이만 들썩거
려도 일제히 시선이 저한테 꽂혔습니다. 가슴이 쿵덩쿵덩
거리고 온몸이 달아올랐습니다. 먼저 나간 녀석들은 눈이
빠지라고 기다릴 텐데 좀처럼 기회는 안 오고…….
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세 번째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기
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. 세상에, 퀴퀴한 화장실 앞 구
석진 복도에서 우리 동네 선배를 만나지 않았겠습니까. 평
소 별로 친하지도 않던 선배를 그것도 그리 힘껏 껴안아
보았을까. 좌우지간 수 백 리 먼 타향에서 구세주처럼 만
난 그 선배한테 차 값을 몽땅 떠맡기고 다방 문을 나서는
데 좁은 세상임에도 양어깨가 어찌 그리 넓어지는 것 같던
지…….
상황은 달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뜻하지 않은 곤경에 처
해 보았을 것입니다. 급히 잡아탄 택시에서 내리려고 보니
옷을 바꿔 입고 왔다든가, 슈퍼에서 한 아름 물건 값을 계
산하려는데 지갑을 두고 왔다든가, 모처럼 올라탄 버스인
데 만 원짜리밖에 없다든가 하는 난감한 상황을 말입니다.
이럴 때 어깨를 툭 치며 나타나는 구세주 같은 친구가 하
나씩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, 마치 길 잃은 오지에서 만
난 지프 차처럼.